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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우리시대의 표정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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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에 톨스토이가 있다면 미술에는 일리야 레핀이 있다.”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일리야 예피모비치 레핀(Illya Yefimovich Repim)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와 더불어 최고의 인민 작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인물 심리 묘사에 탁월함을 보였다.

 

또한 톨스토이, 이반 투르게네프, 니콜라이 고골 등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학가들의 초상화를 그린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동시대 '반 고흐' 같은 유럽 출신 인상주의 화가에 비해 러시아 출신의 사실주의 대표 화가인 일리야 레핀은 일반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19세기 일리야 레핀의 출신학교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립미술대학이 그의 이름을 따서 '레핀아카데미'라 불리는 것을 보아 레핀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러시아 예술의 황금기인 1844년에 출생했다. 1800~1900년대 러시아는 러시아의 르네상스라고 할 만큼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각 분야에 걸쳐 두루 배출되던 시기이다.

 

『전쟁과 평화』를 쓴 '톨스토이'를 비롯하여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예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 2번』을 작곡한 '라흐마니노프', 『백조의 호수』라는 발레음악을 작곡한 '차이콥스키' 같은 거장들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했다.

 

19세기 후반 일리아 레핀은 혁명을 테마로 러시아 민중들의 억압받는 삶을 사실주의 화풍에 담아낸 일련의 명작들을 발표한다. 그 대표적 작품으로 당시 봉기가 잦았던 볼가강 지역 인부들의 삶의 모습을 그린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당시 농노제와 차르 군주제의 폐습을 묘사한 『쿠르스크 지방의 십자가 행렬』, 러시아 혁명이 태동하기까지의 격렬했던 민중 세력의 투쟁을 그린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등을 들 수 있다.

 

그러한 그의 예술적 삶의 한 축은 '억압받는 민중에 대한 사랑' 이었다. 그래서 레핀의 작품에는 이처럼 민중 고취 의식에 대한 비장함이 담겨져 있다.

 

또 다른 한 축은 '문호 톨스토이를 비롯한 동시대의 예술가들과의 교류' 였다. 그러나 톨스토이와도 아주 친했던 그는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술이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의 선전도구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예술과 정치, 그것에 대한 인간마다의 각기 다른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이치이다. 레핀의 작품에는 19세기 러시아의 현실과 시대정신을 풍부하게 담아냈다. 격동기를 살아가는 민중의 삶이 거침없이 그려졌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과 풍부한 감성, 그리고 날카로운 통찰력은 그의 사실주의 회화를 완성시킨 원천이었다.

 

그러한 그의 예술가로서의 의식(意識)은 단순히 '낭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탈출구를 찾을 수 없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 그의 초미(焦眉)의 관심사는 힘겹게 살아가는 민중의 짓밟힌 삶이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그의 예술적 노력은 그의 대표작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 잘 나타나 있다. 바로 이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 일리야 레핀 /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1888 | 160.5x167.5cm,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당시 아무리 러시아 사회가 폐쇄적 군주제였어도 근접해있는 유럽 국가들의 새로운 학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 사회와 민중들을 구출할 학문을 배우려고 유학을 떠나거나 투쟁 세력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혁명가들을 가장(家長)으로 둔 가족들의 삶은 매우 고난스러웠을 것이다.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라는 작품은 이제 막 유배지에서 돌아온 혁명가인 가장을 가족들이 맞이하는 장면을 그린 명화이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국가, 그 전조를 드리우던 시대의 암울함과 혼란스러움이 이 그림이 묘사한 가족들의 표정 속에 진하게 녹아들어 있다.

 

그림이 작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이를 부분적으로 확대해서 보면 각 사람들의 캐릭터가 확실히 느껴진다. 먼저 그림 속 혁명가는 오랜 기간 유배지에서 억압과 고통 속에 지내다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는 당당함과 타오르는 신념을 눈빛에 담은 채 방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를 맞는 가족들의 표정은 각자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흰 앞치마를 두른 하녀는 문을 열어주며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아내의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가득하다. 또한 혁명가와 마주한 검은 옷의 여인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그에게 막 다가서려 한다.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정치 현실과 이데올로기를 떠나 모정은 본능이다. 여인의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미세한 떨림을 읽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재회의 반가움이 무엇보다 크게 스치고 지나간다. 단지 막내로 보이는 하얀 옷의 어린 소녀만이 기억을 되살려 앞의 '낯선 이'를 확인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듯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이런 표정이 모여 이룬 하모니(Harmony)는 마침내 한 가정의 표정을 넘어 19세기 말 러시아의 표정으로 승화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정부가 집권하며 행정부의 최고 사령탑인 청와대에 문화수석 비서관실이 폐지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또한 최근 대선(大選)을 치루는 과정 중 어느 후보의 입에서도 문화예술에 대한 공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정부 정책에서 문화예술은 뒷전에 두겠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우리 예술가들은 마치 동냥을 구하듯 정부가 던져줄 지원금만 바라보고 있다. 아니, 예술은 내팽개치고 호시탐탐 권력의 자리만 탐하는 탕아(蕩兒)들로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은 나라 안의 경제사정이 최악임을 알면서도 그렇게 해서라도 얻어야 할 표만 챙기려 하고 있다.

 

우리 예술인들의 표정이 그러하다.

 

우리 정치인들의 표정이 그러하다.

 

우리 시대 예술계의 표정은 한마디로 무표정이다. 국민들이 도탄에 빠져있는 현실 속에서 혁명가는 단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아무도 (혁명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저 “세상이 왜 이래?”하는 한탄조의 유행가 자락만 귓가에 간간이 스쳐갈 뿐이다.

 

1930년 9월 29일, 일리야 레핀은 86세를 일기로 핀란드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는 현재 레핀기념관인 페나테스(penates) 뒤뜰에 누워 지금도 변함없이 러시아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우리도 이런 예술가 한 사람쯤 기대해보는 것이 허황된 꿈일까?

 

강 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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