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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혁 칼럼] 高麗時代 名王의 遺言(고려시대 명왕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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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3. 19

 

▲ 김유혁 문화저널21 상임고문, 
   전 금강대 총장
고려왕조는 왕건태조에 의하여 건국되어 34왕 475년간<918-1392> 이어갔다.

3국을 통일하고 등장한 나라가 신라국이라고 한다면, 후삼국을 통일해서 등장한 나라가 바로 고려국이다. 고려는 고구려의 뒤를 이은 나라라고도 하지만 견훤(甄萱)이 이끌었던 후백제의 경우와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고려는 고려이지, 후고구려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의 일부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고려를 혼동해서 표기한 경우도 있다. 그것은 당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나서고자 하였을 때 병술가인 이위공(李衛公:李靖)에게 묻기를, 고려가 자주 신라를 침범한다하니....高麗 數侵新羅...)하면서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시대적으로 약 250년간의 차이가 난다. 미루어 생각하건대 그것은 뒤의 사람들의 오기(誤記)이거나 아니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고려라고 약칭(略稱)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러나 순오지(旬五志)에서는 고려를 산이 높고 아름다우며 물이 말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산고수려(山高水麗)의 약칭이라 했다. 그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문인들이 조선 땅에 태어나서 금강산 한번 구경했으면 좋겠다(願生東方國 一見金剛山)는 시문(詩文)이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확실한 것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고려말기와 조선왕조 초기의 거유(巨儒)이었던 양촌 권근(陽村 權近)선생에게 고려의 풍경을 담은 시를 써 달라는 요청에 응하여 양촌선생이 명나라 태조를 위해 10수의 시를 써서 올린 기록이 오늘에 전해오고 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그 시기는 외침의 위협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후삼국 통일은 더욱 가능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막강했었던 당나라가 904년에 멸망했다. 다시 말하면 당나라 말기인 희종(僖宗)때 부터 약 30년의 기간 중 6년 이상 재위한 왕이 없었다. 거의 1-3년마다 군주가 바뀌는 대 혼란기이었다. 따라서 후삼국 전쟁 중에는 그 어는 나라도 당나라의 외침을 걱정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고려가 건국할 그 무렵에 중국에서는 907년부터 후양 후당 후진 후한 후주(後梁 後唐 後晋 後漢 後周)등이 대립 상쟁하는 오대시대(五代時代:907-960)이었기 때문에 960년에 북송(北宋)이 건국되기 까지는 외세침략의 걱정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010년대부터 걸안의 침략과 몽골의 침략 및 원나라의 압력이 가중되면서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에서 유언 유조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고려태조(26年 在位)의 훈요십조(訓要十條)는 왕조사에 있어서 보기드믄 명조(明詔)임에 틀림이 없다. 군왕뿐만 아니라 모든 치자에게 있어서 마음에 새겨둬야 할 내용의 계훈(誡訓)이 많다고 사려 되기 때문이다. 편의상 요점위주로 살펴본다.
 

  첫째, 간사한 신하가 정치를 맡아하는 일은 절대 금해야한다
  둘째, 불교숭상을 경쟁적으로 하며 사찰을 과다 건설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셋째, 만약 원자(元子)가 못났으면 차자에게 왕위를 승계하라
  넷째, 조선인의 풍토와 인성이 중국인과 다르니 당만을 본 딸 필요는 없다.
  다섯째, 개성은 고려만대의 대업지지임을 잊지 말고...태평성대를 이루어가라
  여섯째, 연등회와 팔관회는 나라 위한 것이니 간신은 절대 관여시키지 마라.
  일곱째, 신민의 마음을 터득해야하고 직간을 받아들이면 성군이 될 수 있다.
  여덟째, 간교한 언어로 권력을 농락하는 자에게는 벼슬자리를 주지 마라
  아홉째, 평안할 때일수록 위기를 잊지 마라.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라.
  열째, 나라 어느 곳 하나 경계하지 않을 곳이 없다. 경륜을 보배처럼 여겨라.

 
제9대 덕종(德宗. 3年 在位)의 유언은 간결하지만 당시의 정치실정을 잘 간파하고 있다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 된다. 덕종의 유언은 조정에서 백성들을 속이거나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백성들이 저마다 그 생업을 즐기면서 살도록 하라(朝廷無欺蔽 民樂其生). 덕종 2년(1033年)에 유소(柳韶)가 천리장성(千里長城:鴨綠江江口에서 定平의 都連浦口까지)을 구축하기 시작함에 있어서 과대 선전과 과대동원의 사례가 있었던 것으로 추축된다.

제10대 정종(靖宗.12年 在位)은 유언을 남기기를, 인효공검(仁孝恭儉)의 소문이 이웃나라에까지 들리고 있다니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다 더욱 현창되도록 애쓰라(仁孝恭儉 聞於隣國 宜傳大寶 以顯耿光). 정종의 유언은 정종 10년(1044年)에 천리장성의 구축이 10년만에 끝났으며, 정종11년에는 불충 불효를 범한 가문의 자제들에게는 과거시험에 응할 수 없다는 조치를 내렸음으로 그러한 일련의 정책이념이 유언으로도 이어진 것 같다.

제11대 문종(文宗.37年 在位)은 유언하기를, 군통수권과 정치 일체를 태자 훈 (勳)에게 맡기고 보위를 전하니 경들은 나의 간곡한 말을 이어받아 충과 효를 다하도록 힘써다오(今以軍國政事 一以委太子勳 用傳寶位 卿等 宜體懇言 勉盡忠孝).

문종은 현군이며 문치(文治)를 잘 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처음으로 오늘의 삼심제인 배심제(陪審制)를 마련하고 손재면역법(損災免役法)을 반포하여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였으며 승려가 되겠다는 그릇된 풍조를 막기 위하여 4형제를 둔 사람이라야 그 중 한 사람의 의무입산(義務入山:승려의 길)을 제도화 하였다. 그런데 문종도 왕자 4명을 두게 되었다. 백성들과 약속한바 있으니 왕으로서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네번째 왕자를 입산시켰으니 그가 바로 동양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의천 대각국사(義天 大覺國師)다.

제15대 숙종(肅宗.9年 在位)은 왕태자에게 이르기를, 인의효우(仁義孝友)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있는 인간의 근본이니 늘 온자혜화(溫慈惠和)하여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하라.(王太子 仁義孝友 本乎生知 溫慈惠和 副於民望).

숙종은 백성들의 경제유통질서를 새롭게 하기 위하여 1011년에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설치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제17대 인종(仁宗.24年 在位)은 태자에게 유언하기를, 태자야 충효의 아름다움은 타고난 자품처럼 일직부터 몸에 익히고 덕업의 융흥은 사람들의 여망에 부응할 수 있어야 가히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咨爾王太子晛 忠孝之美 天資夙成 德業之隆 人望收屬 可卽王位). 인종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겪어야 했고 요승 묘청(妖僧 妙淸)의 도참설에 시달려야 했던 와중에서도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위해 유신십대교(維新十大敎)를 반포해서 백성들을 달래기도 했다.

유신십대교는 검소하고, 수탈이 없고, 민생의 안정을 기하고, 자연의 혜택을 함께 누리자는 내용으로 되어있다.(1.方澤 祭地祗 四郊迎氣  2.車服制度 務從儉約  3.除冗官不急之務  4.勸農力田 以給民食  5.務儲官穀 以待救民  6.取民有制 常租調外 毋得橫斂  7.撫民安土 無使逃流  8.濟危舖 大悲院 厚蓄積 以救疾病  9.無以官穀陳穀抑配貧民 强取其息 又無以陳杇之穀 强民舂米  10.山澤之利 與民共之 毋得侵牟).

제25대 충열왕(忠烈王.35年 在位)은 73세에 서거했다. 35년의 재위기간 중 나라의 어려움이 많았다. 백성들은 생업에 편안할 수 없었다. 간사한 무리들의 날뜀 속에서 어진 충신과 선비들은 다 물러가고 없었으니 이는 나의 부덕한 소치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마음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其間 國步多艱 民不安業 邪佞並進 忠良自退 斯皆否德使然 心甚愧焉).

충열왕은 몽골로부터 고려국의 채면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충열왕 22년(1296年)에는 몽골에 완전히 굴복허여 자주권을 잃고 충열왕이 몽골왕의 사위로 입조하는 등 이른바 국치민욕(國恥民辱)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고려는 충열왕 때부터 고종 원종(高宗 元宗)의 경우처럼 종자(宗字)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품격이 낮은 충열왕, 충선왕의 경우와 같이 왕의 칭호를 쓸 수밖에 없었다.

고려 시대를 점철하는 왕의 유언은 거의가 충효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한 간절한 당부가 담겨있었지만 정치현실은 그렇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국운은 기울고, 제왕은 곤경에 처해있었지만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에 남기는 유언과 유조는 한 결 같이 충효의 혼기(魂氣)를 살리려는 충심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 겨레의 자부심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KECI | 2016.01.31 14:55 | 조회 5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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