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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나의 장인, 장일남 선생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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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에 가면 버몬트(Vermont) 길과 올림픽(Olimpic) 길이 만나는 거리에 한인이 경영하는 ‘이태리 안경점’이 있습니다.

 

과거 필자가 LA 거주 시절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눈에 띄는 그 업소 간판에 적힌 글귀가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저희가 아는 것은 안경뿐입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이 업체는 안경과는 전혀 관계없는 서울대학교 인문계열 출신의 사장이 경영하고 있는데 그가 안경 외에 아는 것이 없어서 그런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를 내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방면에 걸쳐 모르는 것이 없는 듯한, 소위 ‘팔방미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현재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직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은 신뢰감을 넘어 타(他)의 귀감으로 여겨집니다.

 

문득 예전에 가깝게 모셨던 작곡가 고(故) 장일남 선생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장일남 선생은 ‘비목’, ‘기다리는 마음’ 등 주옥같은 예술가곡으로 유명한 작곡가입니다.

 

그뿐 아니라 창작오페라 ‘왕자호동’(1962년)을 첫 작품으로 생전에 총 7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무대에 올렸는가 하면 1986년 국내 최초의 교향시 ‘한강’(김광규 시)을 작곡, MBC 주최로 9월 4일 ‘한강종합개발준공’ 전야제를 통해 초연되었으며 이듬해 8월 26일 필자가 운영하던 공연기획사 ‘아트코리아’ 주최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전 객석이 만석(滿席)인 가운데 연주회가 열린 바 있습니다.

 

굳이 밝히자면 그는 한양대학교 교수였지만 학력이 없는 음악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거 북한에서 평양음악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재직하던 한양음대 내에서는 정교수 대우를 받았지만 대외적으로는 당시 문교부와 관계없는 명예교수였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조치는 장일남 선생의 실력을 인정한 김연준 총장(한양학원 설립자이며 작곡가)의 배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런 장 교수가 매우 존경스러웠습니다.

 

잠시 장일남 선생에 관한 한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시절 당시 연례적으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렸던 민정당 음악회를 기획, 진행했던 필자는 공연을 마친 후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아 출연한 장일남 선생과 함께 리셉션에 초청되어 대통령 곁에 앉게 되었습니다.

 

연회가 시작되자 대통령께서 장일남 선생에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장 교수님, 오늘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연주도 좋았고 관객도 성황을 이루어 마음이 흐뭇합니다”라고 하자 답례로 화답한다는 것이 그만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모두가 ‘서태후 대통령님’께서 관심을 많이 가져 주신 덕분입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성함을 실수로 ‘서태후’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순간 뒤에 섰던 경호원이 장 선생의 등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찔렀습니다.

 

그러나 장 선생은 잘못된 호칭을 쓴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두 차례나 더 같은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때마다 경호원은 계속 등을 찔렀고 이유를 모르는 장 선생은 급기야 젊은 경호원에게 그 큰 눈을 부라리며 “아니 왜 자꾸 찌르는 거야?” 하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사태가 이쯤 되자 이를 주시하던 주변에 많은 참석자들이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대통령의 유머가 작렬했습니다.

 

“장 교수님, 아니 내가 나라를 말아먹은 여자입니까? 나보고 왜 자꾸 서태후, 서태후 합니까? 섭섭합니다…”

 

순식간에 장내에 폭소가 터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반전되었습니다.

 

필자는 연회를 마치고 장 선생의 승용차로 함께 돌아오면서 퉁명스럽게 한마디 건넸습니다.

 

“오늘 장 선생님 때문에 십년감수했습니다. 아니 노태우 대통령 이름도 몰라서 서태후, 서태후 합니까?” 했더니 “그랬소? 듣고 보니 내가 참 미욱했구만, 쯧쯧…… 에이, 괜찮아! 작곡하는 사람이 작곡도 다 모르는데 대통령 이름까지 어떻게 알아!”

 

그 후 필자는 역시 ‘장 선생은 음악밖에 모르는 분’이라 여기며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필자는 이 글의 제목을 ‘나의 장인, 장일남 선생’이라고 뽑았습니다.

 

남자들에게 ‘장인(丈人)’이라 하면 아내의 아버지를 일컫습니다. 그러나 필자가 장일남 선생을 ‘나의 장인’이라 한 것은 ‘장인(匠人)’ 즉, 거장(巨匠, Maestro)을 일컫는 것입니다.

 

비록 2006년에 타계(他界)했지만 ‘비목(碑木)’의 작곡가 장일남 선생은 지금도, 앞으로도 한국음악계의 ‘거목(巨木)’으로 필자의 기억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모든 분야가 정치에 치중하는 듯합니다.

 

경제정치, 사회정치, 언론정치, 교육정치, 심지어는 음악정치 등등..... 마치 과거 제정(帝政) 로마시대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었듯이, 모든 분야가 정치를 통해야만 목표 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정설(定說)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모두 정치판을 기웃댑니다.

 

얼마 전 대선을 앞두고 ‘국민통합’이라는 말이 정치권을 통해 회자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전적 용어로 ‘통합(統合)’이란 ‘여러 요소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먼저 각자 자기 분야에 충실한 가운데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국민통합’보다는 ‘서로 어울려 갈등이 없이 화목함’을 뜻하는 ‘국민융화(融和)’라는 말이 적절한 표현일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앞서 예화를 통해 소개한 ‘이태리 안경점’ 사장이나 작곡가 장일남 선생의 모습이 필자의 눈에 장인(匠人)으로 비쳐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理致) 아닐까요?

 

고대 인도의 위대한 왕 '아쇼카'는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 다섯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아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다섯 그루의 나무는 ‘약나무’, ‘유실수’, ‘연료로 쓸 나무’, ‘집을 지을 때 쓸 나무’ 그리고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아쇼카 왕은 이것을 '다섯 그루의 작은 숲'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도 각자 자기 분야에 정진하는 사람들로 조직된 모임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하여 '다숲'이라 할까요?

 

누가 좀 나서보세요.

 

정치판에 끼어 헛된 논쟁만 일삼지 마시고…

 

강  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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