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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슬픈 노래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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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요 /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 00 유치원, 00 유치원 / 착하고 귀여운 우리들의 꽃동산”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 필자가 봉직하던 모 신문사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유행어가 기자들의 입에 회자(膾炙)되고 있었다.

 

바로 ‘미꾸용’이라는 조어(造語)다.

 

이를 굳이 풀어서 말하면 ‘미꾸라지가 용(龍) 됐다’라는 뜻이다.

 

그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군사정권 시대로 모든 언론사들이 통, 폐합되어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을 때였다.

 

그중에서도 특정 2개 신문사인 'S'신문사와 'K'신문사는 실질적 운영권이 정부에 있다 보니 원치 않는 권력의 시녀(侍女)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S신문사는 '공창(公娼)‘이니, K신문사는 '사창(私娼)’이니 하는 자조적(自嘲的)인 말들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따져보면 필자도 사창가(私娼街)에서 먹고 살던 사람 중에 하나가 아니었던가.....

 

이 미꾸용 이라는 유행어가 생겨난 연유(緣由)는 이러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특히 권력자로서의 세가지 기본적인 '필요인연'이라면 '혈연', '지연', '학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주변에 학연을 충족시킬 인물들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이때 약삭빠른 어느 참모가 발굴(?)해 낸 학연인물(중학교 동문) 중 한 사람이 바로 공창언론사인 S신문사 편집국장 'ㅈ' 모 씨였는데 이분이 낙하산 인사에 의해 사창언론사인 K신문사 사장으로 임명되자 생겨난 말이다.

 

ㅈ사장은 부임 후 어느 날 기자들과 함께 신문사 근처 식당에서 회식 자리를 갖게 되었다.

 

사장이 참석자 모두에게 격려의 잔을 하사(下賜?)하고 난 후 좌중(座中)에 노래를 청하자 한 사회부 기자가 벌떡 일어나 사장을 바라보며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는데 그때 부른 노래가 바로 글머리에 올린 ‘유치원가(歌)’였다. 물론 가사 중 ‘유치원’ 앞에는 우리가 속해있는 신문사 이름인 ‘00’을 붙여서 말이다. 이에 따라 한바탕 웃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안에는 한동안 침통한 분위기가 흘렀다. 

 

요즘 정치권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곤 한다. 특히 TV를 통해 국회의원들의 의정(議政) 활동을 볼 때마다 한심함을 넘어 치솟는 분노(憤怒)에 TV 화면을 깨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시중(市中)에서 떠도는 말 가운데 국회의원을 ‘국개의원’이라 부르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렇게 국회의원의 명칭을 비하(卑下)하다 보니 한편 국회의원의 별칭인 ‘선량(善良)’이라는 멋진 단어가 떠오른다.

 

선량이란 원래 조선시대 과거급제(科擧及第)자로 임금이 선발한 인재를 말한다.

 

앞서 일찍이 중국 한(漢)나라에서는 지방 군수가 ‘현량방정(賢良方正)’ 즉, 성품이 어질고 품행이 바르며 또한 ‘효렴(孝廉)’ 즉, 효성스럽고 청렴한 관리(官吏)를 뽑아 조정(朝廷)에 천거했는데 이때 뽑힌 사람을 선량이라 일컬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대에 이르러 일본에서 국회의원을 ‘국민의 선량’이라고 한 것을 후에 같은 호칭으로 표현한 것이 오늘날 국회의원의 또 다른 명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을 국민의 선량이라 칭하기는 했지만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1945년 패전(敗戰) 전(前)까지 일본의 주권은 일왕(日王)에게 있었기에 아무리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일지라도 일왕의 신하로 쓰임 받던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기에 국민에 의해 뽑힌 국회의원은 국민을 위한 공복(公僕)이지 결코 권력자에게 쓰임 받는 관료는 아니다.

 

만일 국회의원이 국민보다 권력자를 위해 존재한다면 이는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권력자의 선량’을 보는 것 같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에게 ‘국민의 선량’이라는 표현은 한 번쯤 재고(再考)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렇듯 선량이라 부르는 국회의원은 앞서 언급한바, 조선시대의 과거급제자와 같이 교양과 지식이 출중해야 한다. 또한 중국 한나라에서 선발한 관리와 같이 현량방정하고 효렴 해야 한다. 이것이 국회의원의 기본(基本)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은 차치(且置)하고 식견이나 품격은 물론 정직성이나 진실성마저 갖추지 못한 유치원생 수준의 철없는 '얼라'들이 천방지축 날뛰고 있는 것이 우리 국회의 현실이다.

 

거두절미하고 근래에 필자를 아연실색케 했던 선량의 기막힌 모습 몇 가지를 간단히 언급해 보면.....

 

▶ 미국 명문대학 박사 출신 ‘김’모 의원은 법제사법위원회 공개회의에서 “법원이 행정부이듯 검찰도 행정부 소속.....”이라고 천명(闡明?)함으로 용감한 국회의원의 입을 통해 '삼권분립'을 실종(失踪)시켜버렸다. 또한 “법무부 장관이 답변을 안 하는 것은 일종의 ‘묵언수행(黙言修行)’으로 품격 있는 대응이다”라는 유치원생도 비웃을 황당한 이야기를 선량의 어록(語錄)에 남기기도 했다.

 

▶ 지난 2020년 6월 16일 북한의 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 폭파사태에 대해 “대포로 쏘지 않은 게 어디냐?”라고 비아냥거렸던 ‘송’모 의원(외교통일 위원장)이 이번에는 “핵무기 5,000개 가진 미국이 어떻게 북한에게 핵을 갖지 말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라며 북한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

 

▶ 최근 위안부 후원금 비리 혐의로 기소된 ‘윤’모 의원이 다섯 명의 지인과 함께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와인 파티'를 벌인 사진을 SNS에 올려 논란이 되었다.

 

윤 의원은 “12월 7일은 길원옥 할머니의 94번째 생신이었으나 만나 뵐 길이 없어 축하 인사도 전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인들과의 식사자리에서 안타까움과 그리움을 나눈다는 것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 되었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길 할머니 측은 “윤 의원으로부터 전화도 없었다”고 해서 거짓해명 논란까지 불러 일으켰다.

 

한편, 우연히도 그날은 음력으로 윤 의원의 생일이었다.

 

앞서 예로든 사례(事例) 외에도 이들은 개인의 유익과 당의 필요에 따라 당헌, 당규마저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는가 하면 국정감사나 청문회, 또는 법안 의결을 위한 회의에서 벌어지는 여, 야는 물론 남녀노소 의원 간의 ‘쪽수 싸움’을 보고 있노라면 한심하다 못해 구역질이 날 지경이다.

 

이들은 애국적 신념이나 자신을 선출해준 국민에 대한 애정과 예의 등은 팽개친 채 오로지 당리당략(黨利黨略)에 따라 온갖 권모술수로 아귀다툼을 마다하지 않는 철없는 악동(惡童)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을 보니 그들의 지적(知的) 수준이 아직도 유치원생에 머물러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일본에서는 성장과 함께 이름이 바뀌는 물고기를 출세어(出世魚)라고 한다. 출세어의 어원은 일본의 에도시대(江戶時代) 무사(武士)나 학자가 성인이 되거나 출세하였을 때 이름을 바꾸는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출세어의 대표적 어종(魚種)으로는 방어(魴魚)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방어는 지방에 따라 각기 이름이 다르다.

 

예를 들어 간토(關東) 지방에서는 같은 방어라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치어(稚魚)는 ‘와카시(わかし)’라 부르고, 40Cm 쯤 자라면 ‘이나다(いなだ)’, 60Cm 쯤 자라면 ‘와라사(わらさ)’로 부르다가 약 80Cm 이상의 성어(成魚)가 되면 ‘부리(ブリ)’라 부른다.

 

그러나 성장과정을 통해 이름이 바뀐다고 모두 출세어는 아니다. 생김새나, 맛이나, 영양가가 월등히 뛰어난 것만이 출세어로 꼽힌다. 따라서 ‘부리’라 불려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와 희소성을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국회의원을 방어에 비유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부리‘여야 한다. 그래야만 개인적으로 가치와 희소성을 인정받는 출세어로 꼽힐 수 있으며, 공적으로도 맛이나 영양가가 뛰어나 많은 이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국회 안에는 치어인 ‘와카시’들로 가득한 것 같아 나라의 장래가 심히 우려된다.

 

이렇듯 ‘와카시’들이 모인 국회를 바라보니 과거 군사정권 시절 어쩔 수 없이 권력의 시녀(侍女) 노릇을 하던 동료 기자들이 자신이 근무하던 신문사를 스스로 유치원이라 비하하며 목청 높여 부르던 그 아픈 음성이 새삼스레 귓가에 생생하다.

 

“·····국개 유치원, 국개 유치원 /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앞으로 우리 국회에서는 이런 자조적인 슬픈 노래가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 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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