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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어느 가련한 여인의 조락<凋落>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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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 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

 

김춘수 시인의 ‘가을 저녁의 시’ 첫 구절이다. 

 

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나 보다"라고 한 김춘수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가을이 깊어가면 마음의 병도 깊어져 어쩌면 이 덧없는 생명들이 조락(凋落)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이미 잎새를 떨구어버린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백과(百果)의 형색이 어쩐지 처연해 보인다.

 

늦가을을 지나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산과 계곡에는 몇 잎 남지 않은 단풍이 생명의 마감을 앞두고 붉은 빛깔로 타오르는 마지막 몸부림을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있다. 참으로 잔인한 모습이다.

 

만일 인간에게 조락되어가는 빛깔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 즐길 수 있을까?

정말이지 이 가을엔 누군가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를텐데..... 

 

▲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와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영국의 천재적 첼리스트 ‘재클린 뒤프레(Jacqueline du Pre)’는 여섯 살 때 이미 첼로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열일곱 살 때 '엘가(Edward Elgar)‘의 <첼로협주곡>을 연주하므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으나 27세 되던 해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첼로를 켤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일찍 은퇴하게 된다.

 

그 후 15년의 세월을 가혹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병마와 싸우다 4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 불행한 삶의 모습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나 일찍 그 삶을 마감한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극히 사랑했던 남편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의 배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거슬러 올라가 재클린 뒤 프레는 그의 나이 21세 때인 1966년 크리스마스의 한 파티 장소에서 무명의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곧 깊은 사랑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심한 반대에 부딛쳤다. 당시 영국 언론들은 "영국산(産) 장미와 이스라엘산(産) 선인장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라고 우려의 보도를 내놓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1967년 '다니엘 바렌보임'과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다니엘 바렌보임은 지휘자로 데뷔했고 초기의 커리어(Career)를 쌓는데 있어서 이미 세계적 명성을 얻은 아내 재클린 뒤 프레의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 아니, 자신의 지휘자로서의 성공을 위해 아내를 협연자로 혹사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병으로 괴로운 증상을 호소했지만 다니엘 바렌보임의 출세를 위한 욕심은 오히려 짜증을 내며 더 혹독하게 아내를 몰아붙였다.

 

결국 재클린 뒤 프레는 결혼한 지 5년 후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진단받고 27세에 은퇴, 투병 생활을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은 가출을 한다. 

 

손가락 마비 증세로 스스로 전화 다이얼도 돌리지 못해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다니엘 바렌보임은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시키로바(Elena Bashkirova)'와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그들 사이에서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리고 병상의 아내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 채계속 이혼을 요구했다.

 

아내 때문에 출세한 남편. 그러나 그는 아내가 병으로 고통당하며 죽어갈 때 다른 뭇 여성과 함께 젊음을 만끽했다. 

 

재클린 뒤 프레는 병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보다, 외로움과 싸우는 것이 더 힘들었다.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이지만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잘 견디다가도 외로움에 휩싸이면 주변 사람들에게 절규하듯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이 삶을 견딜 수 있죠?". 

 

장미의 가시는 앙증스럽지만, 선인장의 가시는 치명적이다. 재클린 뒤 프레는 그 선인장 가시에 찔려 조락한 측은한 여인이다.

 

이 여인은 세상에 태어난 지 21년 만에 다니엘 바렌보임을 만났고, 만난 지 21년 만에 사랑했던 다니엘 바렌보임의 잔인한 가시에 찔린 채 속절없이 지고 말았다. 그녀가 진날도 오늘과 같은 어느 늦가을 날이었다.

 

지금은 세계 정상의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는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 

민족 간 화합과 세계 평화를 역설하며 분주히 세계를 돌아다니는 다니엘 바렌보임. 

그러나 자신에게 오늘이 있게 해준 아내를 배신한 패륜아 다니엘 바렌보임.

그에게 재클린 뒤 프레는 영원한 아킬레스건(Achilles Tendon)이 될 것이다. 

 

오늘날 이런 패륜아가 어찌 다니엘 바렌보임 한사람 뿐이겠는가?

내가 아는 이런 부류의 정치인, 경제인, 예술인 등 수많은 이지러진 인간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이들은 순수한 사랑의 결실보다는 단순한 욕정을 위해, 더욱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바렌보임과 같이 아내의 명성과 재물을 필요로 배우자를 선택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장인의 후광을 필요로, 혼인이라는 관계를 통해 그 가로등 밑에 머물다 그 빛이 쇠하여 희미해지면 곧 다른 가로등 밑으로 옮기는 파렴치한들이다. 

 

필자는 이런 사랑을 ’필요사랑‘이라 명명하고 싶다.

 

그래서 이런 사랑이 역겨워 어느 유명 가수는 자신의 노래를 통해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고 절규했나 보다.

 

오늘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랑의 배신에 의해 조락한 비운의 첼리스트에 관련된 음악 두 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

 

독일계 프랑스인으로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인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의 작품 중 《재클린의 눈물(Jacqueline's Tears)》이라는 첼로곡이 있다.

 

이 곡은 오펜바흐가 영국의 천재적 여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의 죽음을 애도하며 헌정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 곡은 재클린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작품이다.

 

오펜바흐(1819~1880)와 재클린 뒤 프레(1945~1987)는 동시대 인물이 아니다. 오펜바흐는 재클린 뒤 프레보다 무려 126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니 오펜바흐가 재클린 뒤 프레를 위해 곡을 썼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알려지기로는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Werner Thomas Mifune)’라는 독일 첼리스트(1951~현존)가 재클린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6년, 우연히 오펜바흐의 미발표 악보 하나를 찾아내게 되었고 이 곡을 그가 흠모하던 재클린 뒤 프레의 죽음을 애도하며 《재클린의 눈물》이라는 표제를 붙여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이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은 비운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를 기리는 음악이 된 것이다. 참으로 가슴을 후벼 파는 듯 슬프도록 아름다운 곡이다. 

 

'패티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이 노래는 우리나라 대표적 대중가요 작곡가 중 한 사람인 ‘박춘석’이 작사 작곡하여 역시 우리나라 최고의 대중가수 '패티김'이 불러 큰 인기를 얻은 곡이다.

 

첼리스트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가 자신의 음반이 한국에서 인기를 얻게 되자 한국의 인기가요 한 곡을 자신의 연주로 취입하여 소개했는데 그것이 바로 패티김이 부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이다.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의 첼로 연주로 빚어낸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은 가엾은 재클린 뒤 프레에 대한 애틋한 정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 겨울은 아직 멀리 있는데

사랑할수록 깊어가는 슬픔에/ 눈물은 향기로운 꿈이었나

당신의 눈물이 생각날 때/ 기억에 남아있는 꿈들이

눈을 감으면 수많은 별이 되어/ 어두운 밤하늘 흘러가리

아, 그대 곁에 잠들고 싶어라/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눈물로 쓰여진 그 편지는/ 눈물로 다시 지우렵니다

내 가슴에 봄은 멀리 있지만/ 내 사랑 꽃이 되고 싶어라“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은 비록 대중가요지만 우연스럽게도 그 가사나 선율이 재클린 뒤 프레의 슬픔을 표현하는 것 같아 ‘제2의 재클린의 눈물’이라 부르고 싶다. 

 

1987년 10월 19일 가을을 남기고 떠난 여인 재클린 뒤 프레. 

그저 가슴에 한껏 안아주고 싶은 가련한 여인이다.

 

위에 소개한 두 곡 중의 한 곡인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을 '베르너 토마스 미푸네'의 첼로 연주로 듣고자 한다.

 

요즘 정치판의 불미스러운 의혹으로 첼로라는 악기에 구정물이 튀어 명예롭지 않은 유명세(有名稅)를 얻고 있지만 이 음악을 들음으로 순수 클래식 악기의 진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Jacques Offenbach 《Jacqueline's Tears》 Cello, Werner Thomas Mifune 

 

참기보다는 쏟아내는 듯 그녀의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당장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온몸의 마비 증세로 눈물조차 마음대로 흘리지 못한 재클린 뒤 프레.

 

지금 내 곁에선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이 슬픔의 악기인 첼로의 선율을 타고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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