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KECI 칼럼

[강인 칼럼] 한(恨)

이세훈

view : 180

과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을 때, 당시 학장이었던 'Dr. Flesher'라는 지도교수로부터 '한국인의 한(恨)'을 주제로 쓴 자신의 논문을 교재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내용인즉 "한국인은 우수한 민족이기는 하지만 오랜 세월 품어 온 '한'이라는 정서로 인한 개인주의의 팽배로, 서로 다툼이 많고 하나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남북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아직도 분단국가로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이 강의를 듣는 외국 학생들은 꽤나 흥미를 갖는 것 같았다. 또한 매우 독특한 주제로 쓴 논문이기에 쉽게 심사에 통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미국 교수의 논문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를 깊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가치 없는 연구 결과로 여겨졌다. 필자는 그 학기를 끝으로 학위 과정을 중단했다. 

 

'한(恨)'--

 

이 '한'은 우리네 여인들이 부서진 놋쇠 항아리처럼 수십 년, 수백 년 보듬고 살아온 운명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이 '한'이라는 말이 여인들에게 어울리는 표현일까? 우리네 여인들은 칠거지악(七去之惡)과 같은 계율 속에서 회한 어린 삶을 강요당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은 끝까지 스스로 인내하면서도 타인에게는 결코 해를 끼치거나 원망하는 법이 없이 자기 자신의 큼지막한 희생의 주춧돌 위에 쌓아온 고통과 눈물어린 인고(忍苦)의 세월, 이것이 우리네 여인들의 '한'이다. 

 

이렇듯 가슴 깊이 묻어 둔 여인들의 '한'을 노랫가락을 통해, 춤사위를 통해 풀어내곤 했는데 그 대표적 가무(歌舞)가 바로 '아리랑'이요, '살풀이춤'이다. 

 

▲ 우리 민족의 ‘한(恨)’을 풀어내는 대표적 춤인 ‘살풀이춤’


이제 세상은 많이 변했다. '한'의 모습도 변했고, '한'의 철학도 변했다. 또한 '한'이라는 고통도 없어지고, 그런 고통조차 감내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한'이 맺히면 이내 보복으로 대응하는 시대다. 

 

그런데 요즘처럼 고통도 인내도 모르는 인간들이 득실대는 이 시대에 지난날의 그런 '한'이란 것이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요즘 끝없이 정쟁(政爭)으로 치닫는 과열된 우리 정치 현실을 바라볼 때 각 정당의 슬로건이 ‘한의 정치', '심판과 보복의 정치'를 표방하는 것 같아 심히 우려된다. 정치는 국민의 평화와 안녕과 복리 추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일개 정치 집단이나 개인의 '한풀이(가슴에 맺힌 원한을 푸는 일)'를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Flesher 교수는 과거 여인들이 가슴에 맺힌 '한'을 대신 풀어냈던 '아리랑'이나 '살풀이'춤 같은 문화적, 철학적 심오함은 이해하지 못하고 한낱 일부 정치인들의 '한풀이' 다툼이나 어깨너머로 보아 온 것은 아닐까? 

 

지난 2015년 한명숙 전 총리는 9억 원가량의 뇌물수수죄로 실형을 선고받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 적이 있다. 그는 사회운동가 출신의 극좌파 성향 정치인으로 '한의 정치'의 대모(大母)다. 그가 서울구치소에 수감 되기 전 "비록 제 인신은 구속한다 해도 저의 양심과 진실마저 투옥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칠십 평생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왔습니다."라며 끝까지 반성보다는 죄 없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듯 자기주장을 토로했다. 또한 지지자들을 향해 "사법정의는 죽었다"라고 외치기도 했는데 이는 아마도 자기보다 더 많은 뇌물을 받고도 법망을 피한 정치인들이 많은데 겨우 9억 원밖에 받지 않은 자신에게만 왜 이리도 가혹한가? 하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칠순 여인의 한 맺힌 절규로 들린다.

 

과연 한명숙과 그 아류(亞流)들의 한 맺힌 사연은 무엇일까? 그것이 못난 정치꾼의 사욕이든 혹, 정치 집단으로서의 집권욕(慾)이라도 좋다. 또한 이 시대 인걸을 내지 않은 세월을 원망하며 나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혹여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는 아니, 앞으로도 절대 이루어져서도 안 될 적화통일의 한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부디 '한(韓)명숙'은 지금이라도 깨달음을 얻어 더 이상 '한(恨)명숙'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이제 그만 ’한’을 부추기는 소모적인 촛불은 끄고, 밝은 대낮 서울광장에 모두 함께 모여 '아리랑'을 소리 높여 부르며 '살풀이춤'이나 신명나게 추어봤으면 좋겠다.

 

오늘은 우리의 대표적 전통민요인 아리랑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한'이 담긴 노래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가사와 리듬이 조금씩 다른 수많은 아리랑이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아리랑이라는 말은 학자들에 의해 여러 의미로 해석되고 있는데그중 두 가지 의미만 소개하고자 한다. 

 

1)

‘아리(阿利)’는 '아름답다', '곱다', '크다'라는 뜻이다. 

한강(漢江)의 원래 이름이 '아리수(阿利水)‘이고 우리말의 '아리따운'에서도 그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랑'(郞)은 '님'이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아리랑'은 '크고 고운 님' 쯤으로 풀이하면 좋을 듯하다. 

‘몽골’에서도 '아리(阿利)‘는 '성스럽다',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2) 

아리랑은 한자로 '我理朗'이라 하여 '아리(我理)‘는 '나'라는 뜻의 '아(我)’와'이치'를 말하는 ‘리(理)‘를 합쳐 '나를 깨닫는 것'이고 또한 '즐거움'이라는 뜻의 '랑(朗)’을 포함하여 '아리랑'은 '참된 나를 깨닫는 즐거움'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어떻든 둘 다 참 좋은 의미임에 틀림없다. 

 

요즘 우리의 국위선양과 함께 아리랑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나가 코리아(Korea)보다도 오히려 아리랑이 더 잘 알려질 정도로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지난 2008년 2월 26일에는 세계적인거장(巨匠) 지휘자 '로린 마젤(Lorin Maazel)'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평양에 가서 아리랑을 연주하기도 했다.

 

 

▲ ‘아리랑’ 실황공연 | 2008년 2월 26일, 동평양대극장 | 연주,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 / 지휘, 로린 마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노랫말의 내용이 이렇게 회한(悔恨)과 서러움으로 시작되는 우리의 대표민요 아리랑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소맷귀를 적시게 된다. 

 

그러나 이 슬픔은 '괴테(Goethe)'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이 마침내 자결로 몰아가는 그런 극단의 슬픔 같은 것은 아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지...'하는 약간의 여유와,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해 안타깝고 서러운 인고의 아픔이 서린 그런 슬픔이다.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온 노래 아리랑은 그런 페이소스(Pathos)가 짙게 깔려 있다.

 

강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외부필진의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먼저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세요.

창닫기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