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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석 칼럼] 종교는 종교요 예술은 예술이다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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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진단 없이 힘으로 밀어 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종교는 종교요 예술은 예술이다'. 평소 좋아하던 성철 스님의 유명한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패러디해 보았다. 일반사람들이 했다면 그저 맹물같은 소리라 할지 모르나 득도(得道)한 고승의 말씀이니 마음을 움직인다. 이처럼 ‘경지’란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이 위치에 종교와 예술이 있다. 동서양 문화사를 보아도 물론 종교와 예술에 힘겨루기가 존재했고 갈등도 적지 않았다.  

 

유럽에서 카톨릭 교권의 위세가 성당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한 고도제한 하나만 보아도 절대 권력의 어마어마한 힘을 실감케 한다. 종교에 예술이 없다면? 거꾸로 예술에 종교가 없었다면, 어리석고 어리석은 우문(愚問)이다.때문에 심미안(審美眼)이 없으면서 이곳 저곳에서 무식한 말들을 쏱아 낸다면 종교를 위해서도, 예술을 위해서도 도움이 안된다.리어카에 파는 1만원짜리 싸구려 항아리와 국립박물관 골동품 도자기를 당신이 구별할 수 있는가? 진품 명화와 짝퉁을 구별할 능력이 있는가? 자칫하면 세상이 거꾸로 가는 엄청난 후퇴가 있다. 

 

바야흐로 불교도 음악 만들어 수출하는 시대

 

동양이나 서양이나 문화는 그 시대마다 인간 정신의 최고의 점정에서 빗어진 예술적 산물이다. 이걸 나의 어슬픈 상식으로 재단하고, 더구나 이를 정치적인 힘을 가세해 밀어 붙이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이제 불교도 범패 등 주옥같은 바탕 재료가 엄청나다. 한류를 타고 K-Classic을 하기위해 이미 많은 작곡가들이 불교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때에 콘서바토리도 만들고 인재를 양성하면서 작곡가도 길러내어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어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좋은 작품이 있는데도 이걸 공연하지 않는다면, 이때 형평성이던 편향성이던 몽둥이던 들이 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방송을 보면 젊은 세프들의 음식 메뉴 경쟁이 치열한데, 청중이 기독교 레퍼토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공연에 관심과 과감한 예술 투자기 좀 있었으면 한다. 

  

▲ 극찬을 받은 성공적인 연주가 종교편향 문제로 불거진 부산시립합창단의 공연 포스터 (사진=부산문화회관)

 

서양 클래식의 거부할 수 없는 기조(基調)는 기독교다. 그 오랜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예술이 인류문화유산으로 남아 종교와 동행하며 우리를 행복하고 즐겁게 위로해 준다. 중세에 종교로부터 예술이 탈출 선언을 하고서도 르네상스가 꽃피워진 것 역시, 문화사의 토양이 충분히 축적되어 온 결과로 이같은 영향이 귀족들에게 고스란히 베어들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예술이 교회에서 궁정으로, 살롱으로 장소만 이동한 것이니까. 그래서 예술의 존중과 후원도 자연스러운데 우리의 정치와 종교는 이러질 못했다.

 

예전에 양반, 상놈하던 시대에도 판소리를 즐겼고, 사대부가 시서화에 능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격동의 세기를 살면서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때문에 보석이 눈 앞에 있어도 모르면 길가에 굴러 다니는 돌멩이 쳐다보듯 천대를 받는다. 

 

종교 편향성 프레임 잘못사용하면 후진국으로 망신   

 

최근 부산시립합창단에서 촉발된 불교계와의 갈등을 보면서 이같은 시비(是非)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의문이다. 몇 해전 대구에 이어 이번 부산 그리고 국립합창단에까지 불똥이 옮겨 왔다. 이전 대구의 경우는 분명히 지나친 것이 맞다. 지금도 지휘자들의 인식이 좀 왜곡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번 부산시립합창단 문제는 종교로 보기 보다  예술작품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합창계의 입장인 것 같고 필자 역시 그러하다.

 

불교측은 우선 레너드 번스타인의 ‘치체스터 시’, 윌리엄 월튼의 ‘벨사살의 향연’은 전곡 기독교 찬양곡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시로다. 주님의 날이 가까워 왔습니다” 외에도 두 곡에는 성경의 구절이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걸 찬양곡으로 볼것인가,작품으로 봐야하는가의 진단부터 있어야겠다. 그러지 않고 일방적으로 항의나 압박이라면 공정성을 잃게된다. 이런식으로 따지면 거의 대부분의 오페라에서도 주님 가사는 나오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는 성당 앞마당에서 울려 퍼지고, 토스카가 기도하는 장면, 탈옥범이 숨는 곳도 성당이지 않는가. 일찌기 공산국가에서도 없던 일을 용감하게 한다면, 이거 뭐라고 해야 할지, 낯이 화끈거린다.   

 

그래서 기사를 검색을 해보니 문화 지성인들이 쓴 칼럼에서도 불교측 주장과 정면 배치가 된다. 이번 공연에 극찬을 보내고 있다. 시민행복을 최고로 끌어 올렸다는 평가인데, 그렇다면 상(賞)을 내려야 마땅한데, 벌(罰)을 주어야 한다면 관객 입장에서도 큰 혼선이 온다. 용어하나 하나가 심상치 않다. ‘재발 방지’라니?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단 말인가?  잘못된 것으로 용인하고 들어가는 것은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질 수 있다.

 

공연 평가 상반되면 관객에 혼선 초래

 

설상가상 이 분야에 전문가가 아닌 공무원 행정에서 중재에 나서는 것에서부터 얼마나 해답을 가져 올 것인가. 무릇 모든 협상에는 최고의 전문가들이 나서는 것 아니겠는가. 공무원에게 이 폭탄 돌리기의 임무수행을 맡기지 말자는 것이다. 대신  이 쪽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나서고, 토론 결과를 사회와 종교계가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란 제안이다. 그렇지 못하면 미봉책에 그칠 수 있다. 그러면 수술하고 또 수술하는 누더기가 될 수 있다, 당장은 시민의 정당한 문화 향수권이 피해를 보게 되고, 지휘자들 역시  신종 종교 장애(?) 증후군 스트레스로 마치 코로나19 처럼 방역에 온통 신경이 곤두설지 모른다. 자기 검열이 지속되면 예술이 자유롭겠는가.

 

불현듯 1980년대가 회상된다. 필자의 친구 화가 이청운은 80년대 정보부에 끌려갔다.왜 우리가 잘사는데 못사는 달동네만 그리냐는 것이다. 테마가 '구석'인 그는 소외와 삶의 현장을 그렸다.고달픔이 진하게 베어나는 작가는 프랑스에 가서도 몽마르뜨 근교의 달동네를 그렸다. 동양인 최초의 살롱 도똔노 상(賞)을 받았다.

 

그렇다. 한 때 슈스타코비치까지도 적색(赤色)이라 하여 공연심의에서 퇴짜를 맞았다.교회 장로였던 나운영 작곡가가 불교적인 작품을 썼다하여 곤혹을 치뤘다. 김동진 선생은 최무룡, 김지미 주연의 영화음악을 썼다해서 매도를 당했지만 '저 구름흘러가는 곳'은 명곡이 되었다. 작곡가 이영조선생 역시 오페라 ‘처용’과 ‘황진이’에 출연거부를 하는 성악가들도 있었지 않은가. 변훈 선생은 명태를 써 당시 평론가로부터 이것도 곡이냐! 해서 작곡가가 해외로 도피를 했는데, 이후 성악가 오현명 선생이 불러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 오페라 '처용'에 나오는 '승려들의 합창'은 명작으로 평가되어 꾸준히 합창단에 의해 공연되는 불교 작품이다.

 

불교신자이면서 클래식에 능통한 학자외 작곡가, 지휘자들이 나서야

 

이처럼 종교와 예술, 사회와 예술은 오해와 갖은 박해에 시달리면서 꽃을 피워냈다. 때문에 논쟁을 두려워하거나 피해서는 안된다. 비겁하게 몸을 사리는 동안, 그 협상은 만족스럽지 않게 흘러갈 공산이 더 커진다. 불교신자이면서 클래식에 능통한 학자나 작곡가, 지휘자, 교수들도 얼마든 있다. 이들이 리더십을 발휘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건 음악의 문제다. 종교 문제가 아니다. 선수들끼리의 토론을 행정가들이 정리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우리 사회가 전문가의 말조차 무시하는 막가는 세상이 아니라면,  토론을 통해 상호 발전으로 가야 는 것이 해법이지 않을까 싶다.

 

탁계석 한국예술비평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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