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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훈 칼럼] ‘메논’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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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8. 03

▲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 회장    

1950년대 이전에 태어나 평범하게 자란 한국인들은 대개 어린시절의 배고픔을 기억한다. 이른 봄이면 야산을 다니며 진달래를 따 먹다 비슷하게 생긴 철쭉꽃을 잘못 먹고 배가 아팠던 일, 함박눈이 모두 쌀이었으면 하던 바람들, 오뉴월에 피는 감꽃도 아이들은 그냥 두지 못했다.

 

1961년 3월 8일 전남 도청이 공식 집계한 도내 농가는 16만4천42호로 총 94만6천명이 대책 없이 굶고 있었다. 보릿고개였다.

 

“각 면사무소에는 구호를 원하는 농민이 줄을 잇고, 이들은 대부분 부창증 때문에 발걸음마저 제대로 옮기지 못하고 있다…이런 현상은 날로 늘어나고 있고 구정을 지난 뒤 10대들의 가출이 부쩍 증가하였다…”

 

한 일간 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같은 시기의 도시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961년 3월 12일자 같은 신문의 사회면은 현대판 흡혈귀라 할 수 있는 뎃빵족의 횡포를 개탄하고 있다. 당시 서대문 적십자병원, 서울대 부속병원, 성모병원, 백병원 등 서울 시내 9개 병원은 자기 피를 팔아 돈을 마련하는 가난한 이들로 연일 문전성시였다.

 

그들은 큰 대접 하나 분량인 380cc의 피를 뽑고 4천 환의 돈을 받았다. 뎃빵족은 새벽부터 줄을 서 있다가 매혈을 원하는 사람이 늦게 나타나면 피 값에서 500~1000환은 뜯어내고 자리를 팔았다. 이들은 새치기는 물론, 항의하는 사람에게는 마구 주먹을 휘둘러댔다. 경찰의 단속이 강화되면 뎃빵족은 자신들의 피를 파는 속칭 ‘앗싸리족’으로 변해버렸다.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
1955년 10월 8일 유엔 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Menon)’이 한 말이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의 복구를 돕기 위해 UN에서 파견된 특별조사단의 단장인 메논이 일주일 동안 방문 후 보고한 내용이다. 그는 한국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결론지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시찰하고 돌아간 영국 <런던 타임즈> 사이먼즈 기자도 똑같은 말을 신문 헤드로 썼다. 이 말은 당시 우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실망을 주었다.

 

학생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못 살겠다 갈아보자”, “외국상품 추방하자”, “독재정권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민 항쟁을 주도하였다. 결국 1960년 4월 19일의 학생 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다.

 

1960년 말 경제 사정을 보면 1인당 GNP는 단돈 87달러였고, 외화 보유고는 2천3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무역규모는 대만이나 필리핀에도 훨씬 못 미쳤다. 한국은 3천3백만 달러를 수출하고, 3억4천4백만 달러를 수입했다. 그 대금지급은 대부분이 공공 원조로 이루어졌다. 2억 3천 2백만 달러가 원조 자금이다. 원조금으로 나라 살림을 꾸려 나갔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역의 반세기 역사는 해방 후 1963년까지 개인 무역 위주의 여명기에 불과했다.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한 1964년부터 수출다운 수출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수출 1억 달러 달성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1억 달러라는 액수는 전 세계 국가 중 84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대단한 일이었다. 석유, 철강 등 원자재는 물론 쌀과 보리 등 생활필수품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이 끝난 1971년 우리의 수출은 10억 달러로 급성장했다.

 

1970년대는 세계 경제의 높고 험한 격랑 속에서 본격적인 시련과 도전을 통해 자립경제와 고도성장을 실현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우리 경제는 이 시기에 국내외적으로 수많은 정치, 경제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연평균 12.7%의 비약적 성장을 이루었다.

 

1977년 11월 30일, 제13회 수출의 날 행사가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오전 10시 정각 박 대통령의 입장과 더불어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국민 여러분, 오늘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릴 보고 못사는 민족이라고 했습니까.” 박 대통령의 목소리가 외쳐지자 식장에 모인 모든 사람의 얼굴은 어느새 흘러내리는 눈물로 앞을 가리게 되었다.

 

1977년은 우리 민족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해였다. 수출 1백억달러, 그리고 1인당 국민소득이 1천달러가 달성되던 해였다. 전국 방방곡곡, 시골 초등학교와 면사무소 정문에 아치를 세우고 전 국민이 하루를 흥분 속에서 보냈던 날이기도 하다. 당시 1백억 달러 수출 목표 달성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세계가 놀랐다. 전쟁 후의 처참했던 모습으로 알려진 한국. 불과 20여년 만에 1천달러의 국민소득과 1백억 달러의 수출 고지를 정복할 수 있었다. 그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오대양 육대주를 밤낮 가리지 않고 뛰어다닌 세일즈맨들, 세계의 구석구석에 미친 듯이 장터를 펴고 우리 상품을 선전하던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요원들, 대사관 앞뜰에서 넥타이를 풀고 장사에 앞장섰던 우리 외교관들, 이 모든 열기는 분명히 한나라가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이룩하지 못했던 가난의 한(恨)을 박찬 우리 모두의 위대한 성취였다.

 

2015년 우리나라의 1인당 GNI는 3만 달러에 달하여 세계 12위를 기록하게 되었고, 수출액은 세계 6위에 달하고 있다. 수출 대상국은 2백여 국가에 이르고 있다. 오늘이 있게 된 원년, 즉 1960년대 초의 개발연대로 되돌아가보면 잘 살아보자는 희망적 공감대, 오직 공감대 하나를 붙잡고 시작하지 않았는가.

 

1960년대는 결코 흘러간 역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의 유년기이며, 성년기에 들어선 현재 우리 경제의 뼈요, 피요, 성격이다. 그때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가, 라고 세계만방에 외쳤던 유엔 대표가 지금 살아있다면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KECI | 2016.01.31 16:19 | 조회 6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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