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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혁 칼럼]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으로 소통되는 사회 이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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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2. 18

 

▲ 김유혁 박사 (전 금강대 총장)

흔히들 말하기를, 상생(相生)은 좋은 것이고 상극(相克)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런 생각은 이미 옳지 않은 생각이라는 것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오행(五行)의 기능은, 한편으로는 상생원리를 통해서 서로의 조장가능성을 확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극원리를 통하여 서로의 멸실(滅失) 위협을 억제한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상생 상극 관계 통한 조화로운 삶
 
가장 알기 쉬운 예로서 물과 불은 상극이라 한다. 불에 물을 끼어 언지면 불을 꺼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각에서 물과 불이 상극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물과 불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옛 날 학교교실에서 난로를 피울 때 위 칸에는 장작을 넣고 아래에는 물을 부어놓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물에서 산소가 나와서 불을 잘 타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는 물과 불이 상극이면서도 상생의 관계를 지닌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사례인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겨울철에 물을 데워먹기 위해서는 불을 이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물과 불은 상생 및 상극관계를 지니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유용하게 쓰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생원리의 조장기능을 통하여 보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삶의 여건을 마련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가하면, 상극원리는 억제기능을 통하여 위해(危害)와 재앙(災殃)을 막아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는 스스로 새를 불러들이지 못 한다. 이를 인간의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음미해본다면, 상생원리와 상극원리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정치사회에 있어서 정책 없는 당쟁으로 인한 국력의 소모와 반대하기 위한 반목과 대립투쟁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수생목(水生木)의 사회학적인 논리의 일례로 먼저 물을 도덕적 의미로 음미한다면, 물에는 4가지의 덕이 있다하여 이를 수유사덕(水有四德)이라한다. 즉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그것이다.

나무는 스스로 새를 불러들이지 못한다는, 이른바 목불택조(木不擇鳥)라는 겸허함을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고 있다. 새가 나무를 선택할지언정, 나무는 새를 선택하지 못한다. 따라서 칠덕(七德)을 갖춘다면 새들이 그 나무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져간다. 마찬가지로 정치인에게 있어서 득인심(得人心) 한다는 것은, 인심을 유도해서 끌어들인다는 뜻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심의 동향을 터득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곧은 나무 아래 굽은 그림자가 없다(直木之下 無曲影)는 논어의 구절이 있거니와 국민을 대표하고 대변하는 정치인의 경우일수록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이에게는 모함과 음해가 먹혀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곧은 나무의 그림자는 언제나 곧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소로운 것은, 굽은 나무가 그 그림자만은 굽지 않게 꾸며서 보이려는 구차스러운 정치인들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첫쩨,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둘째는 자신의 처신을 위장하며, 셋째는 법의 정신을 오도하고, 넷째는 국민을 기만하며, 다섯째는 하늘을 속이는 여러 가지의 죄를 동시에 범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상극의 원리로 다스려가야 한다. 바꾸어서 말하면 사회적 재앙에 대처한다는 처방논리를 동원하여 선순환(善循環) 사회로 회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상생적 상극원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KECI | 2016.01.31 15:55 | 조회 4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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