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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 칼럼] 아빠 찬스

이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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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기간 관직에 몸을 담고 살아 온 ‘정갑손’은 어찌나 청렴결백한지 사람들은 그를 대쪽대감이라 불렀다. 사적(私的)으로는 다정다감하지만 공적(公的)인 일에는 서릿발처럼 엄격해 인정이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부하들에게는 “쌀 한 톨이라도 나라 재산을 축내는 자는 목을 베어 벌하리라!”라는 추상같은 호령으로 늘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정갑손에게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했듯이 정갑손의 아들 ‘정오’도 어리지만 매사에 반듯했다. 글도 빼어나 또래 친구들이 사자소학(四字小學)을 공부할 때 정오는 벌써 사서(四書)를 읽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정갑손은 함길도(咸吉道)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어 온 식구들이 그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정오는 열일곱 헌헌장부(軒軒丈夫)가 되어 삼경(三經)까지 통달하였다.

 

부임 후 정갑손이 조정(朝廷)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한 달간 다녀오니 밀린 결재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를 밤새워 처리하던 중 정갑손이 부재중에 치렀던 향시(鄕試) 합격자 명단을 보게 되었다.

 

향시는 지금의 도청(道廳) 급인 관찰부에서 치르는 지방 과거(科擧)로 합격하면 초시(初試)나 생원(生員)이 되어 본고사인 한양의 과거를 볼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런데 그 함길도 향시 장원에 정오의 이름이 올라 있었던 것이다. 정갑손은 즉시 이방을 불러 “당장 정오의 장원 합격을 취소시키라.”고 호통을 쳤다.

 

이튿날 아침, 향시 출제 채점위원인 사관들이 몰려왔다. “정오의 학문은 당장 한양 과거에 가도 장원이 틀림없소이다. 그것은 우리를 모독하는 것이외다”라고 나이 지긋한 사관들이 항의하며 모두 사표를 던졌지만 정갑손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관찰사로 있는 한 정오는 합격시킬 수 없소이다.“ 다음날 정오는 밝은 표정으로 아버지 정갑손에게 큰절을 올리고 경상도에 있는 그의 외가로 내려갔다.

 

이듬해 정오는 경상도에서 향시 장원을 하고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도 장원급제를 한후 어사화(御賜花)를 사모(紗帽)에 꽂고 말에 올라 함길도로 돌아왔다.』

 

위는 며칠 전 올해로 구순(九旬)을 맞는 존경하는 선배가 보내주신 고문(古文)을 정리한 글이다.

 

필자는 글 속에 등장하는 정갑손이 누구인지, 또한 실제 있었던 일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글을 읽으며 마음에 깊은 감동과 함께 한편 심히 안타까운 심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는 현재 우리 사회가 너무나 부패했기 때문이다.

 

요즘 세간(世間)에 널리 떠도는 말 중에 하나가 ‘아빠찬스(부모찬스)’이다.

 

이 말은 최근 젊은이들이 공정치 못한 세태, 즉 자신이 혼자 해결하기 힘든 일을 부모의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해결하는 것을 냉소적(冷笑的)으로 표현한 신조어이다.

 

이는 주로 권력층 자녀에게 해당되는 말이기에 이 아빠찬스에 대한 일반 국민의 정서(情緖)는 마치 날선 검(劍)과 같이 예민해져 결국에는 이 시대 공직자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 고려시대(1092년, 선종9년)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상피제도(相避制度)’가 시행되었다.

 

‘서로 피한다’라는 뜻의 상피(相避)제도는 혈연에 따른 부정부패와 폐단을 막기 위해 실시한 규정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할 수 없었고 일정 범위의 친척이 응시자와 시험감독관으로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상피제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관직에 있는 자들이 청렴을 매우 중요한 요소로 여겼으며 이를 권장하기 위해 실제로 성품과 행실이 바르고 탐욕이 없는 ‘청백리(淸白吏)’를 뽑아 보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해 청렴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여기며 실천해온 조상의 노력들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이 상피제도는 오늘날에도 비리(非理) 예방을 위한 도구로 소환되었는데, 예컨대 2017~2019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사건’ 이후 교사와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금지한 이른바 ‘현대판 상피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중에도 근래 정치권에서는 아빠찬스로 의혹을 받는 불미스러운 일들이 밝혀지고 있어 세인(世人)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만 언급하려 한다.

 

하나는, 지난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조국의 딸 조민’의 이야기다.

 

이는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대통령의 최측근인 아버지 조국이 법무부장관으로 내정된 이후 딸에 대한 논문 저자 부당등재 의혹과 자기소개서에 허위 경력 서술 및 이를 통한 부정 입학 의혹이 제기되어 현재까지 재판에 계류되어있는 상황을 일컫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 정권의 보건복지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던 ‘정호영 자녀’의 이야기다.

 

대통령과 40년 지기로 알려진 정호영 후보자가 경북대학교병원 진료처장과 병원장으로 재직 중이던 시기에 두 자녀가 잇따라 경북대 의대에 편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을 말한다.

 

특히 2018년 경북대 의대 편입 특별전형에 합격한 정 후보자의 아들은 응시 과정에서 공저자(共著者)로 참여한 논문 2건을 주요 경력으로 제출, 합격하였는데 이 편입 특별전형은 정 후보자가 병원장이 된 후 신설된 것은 물론 논문 공저자 등재 과정에서도 정 후보자 아들의 기여도(寄與度)가 낮았다는 의혹이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애착(愛着)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따라서 자식 문제로 인한 미흡함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공직(公職)의 대상자라면 자신의 미흡함을 시인하고 부끄러워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금까지도 진정한 사과가 없는 것이 심히 유감스럽다.

 

이미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조국은 말할 것 없거니와, 장관 후보를 지명 43일 만에 자진사퇴한 정호영이 기자단에게 보낸 ‘사퇴의 변’을 보면 사과는커녕 ”법적, 도덕적으로 부당한 행위는 없었지만 국민의 눈높이에 부족했다“는 소극적 유감 표명이 고작이었다.

 

앞서 소개한 옛이야기의 내용과 같이 오늘날 모든 공직자들이 정갑손 부자(父子)의 모습을 본받을 수만 있다면 대한민국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태평성대(太平聖代)를 구가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문득 '저녁 종소리'라는 러시아 민요가 떠오른다.

 

이 곡에는 이런 사연이 얽혀 있다.

 

러시아 짜르 제정시대, 지주(地主)에게 강제로 딸을 빼앗기고 오솔길을 따라 마차를 타고 힘없이 돌아오는 아버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때 저 멀리 평원 너머에 붉게 비치는 석양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 사원에서 울려오는 저녁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진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 이 곡을 들어 보시기 바란다.

 

베이스, 이반 레브로프(Bass, Ivan Rebroff) / 돈 코사크 합창단(Don Kosaken Chorus)

 

"신의 사랑을 받은 성악가"라는 찬사를 받은 러시아 태생의 독일 국적자 ‘이반 레브로프’는 초저음의 베이스이면서 팔세토(Falsetto, 假聲) 발성으로 테너 음역까지 남성이 낼 수 있는 최대의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함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성악가이다.

 

'저녁 종소리' 링크 :   https://youtu.be/kOaBFweHOF8

 

요즘도 권력자의 자녀들이 사회적으로 특혜를 받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권세를 가진 자의 횡포에 의해 힘없는 국민들의 자녀가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의 전횡(專橫)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강 인

예술평론가, 사단법인 카프코리아 회장

 

※외부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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